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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narrative)


사람들이 쓰는 용어에는 유행이란 게 있다. 내 생각에는 그건 말(방송이 만들어낸 유행어는 제외)에서보다는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용어들 가운데에는 너무 따끈따근해서 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고, 쓰는 사람들조차도 무슨 뜻인지 확실히 모르면서 남발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개인적인 무지의 소치를 포함해서 나는 책이나 신문을 읽을 때뿐만 아니라, 네티즌들이 스스로 쓴 글을 읽을 때에도 무슨 뜻인지 애매한 단어들을 자주 접하곤 한다. 그 가운데서도 요즘 가장 자주 접하는 용어가 내러티브(narrative)다.

내가 인터넷에서 찾아본 내러티브의 설명 가운데 그래도 가장 충실한 설명을 여기에 옮겨 본다.

"내러티브는 일련의 사건이 가지는 서사성을 말한다. 스토리(story)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이는 내러티브는 언어로 기술이 불가능한 '모든 종류의 서사성 전부를 포함하는 이야기'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공간이 있고 시간이 있고 사건이 있는 일련의 진행상황을 기술한 대표적인 매체로서의 소설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만으로는 설명이 어려워지게 될 정도로 발전한 각종 매체의 표현 양식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용어라 할 수 있다. 종래의 '이야기'는 시와 소설로 대표되는 문자언어로 표현되어 왔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영상, 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영화에서의 내러티브라 함을 살펴보면 매우 많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편적 문자기호는 물론, 영상의 미장센, 명도나 색채, 번짐과 흐림과 겹쳐짐으로 전하는 영화적 관습에 따른 영상언어로서의 기호가 있으며, 음악과 음향이 전하는 기호 또한 포함된다. 이런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수많은 사건의 집합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내러티브'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 영화, 만화, 음악, 춤 등 모든 수단의 표현방식에서 전하고자 하는 일종의 이야기가 있다면, 그 전달 과정에서 사용되는 기호 - 언어, 문자, 음향, 동작 등이 보편적, 관습적, 특정적으로 기호화된 모든 종류의 전달, 표현 양식 - 와 관계 없이 그것을 지칭하는 것이 '내러티브' 라는 용어다.

예문 :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매우 직관적이고 사실적이다. "

위의 설명이 시간을 죽이기 위한 어떤 백수의 헛소리가 아니라면 내러티브라는 말은 정말 애매모호한 용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용어를 남발함으로써 자신의 글이나 생각의 애매함을 숨기기 위한 '매직워드'처럼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블로거의 글을 잠시 오려서 붙여보자.

"드디어 정성일의 <2046> 비평이 올라왔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도 당혹스럽게도 영화를 칭송하고 있었다. 스타일 분석이나 내러티브 설명 등의 비평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은 내가 그동안 <2046>에 대해 했던 얘기와 거의 흡사하지만, 그 결론은 완전히 다르다." <전문은 여기에...>

이 블로거의 글 전체를 싸잡아 비판할 생각은 없고 그럴 깜냥도 안 된다. 위에 인용한 부분은 그 글의 첫부분인 데 내가 무식해선지 나는 저 문장들을 읽고 어떤 의미도 해석해낼 수가 없다는 거다. 단지 정성일이라는 영화평론가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하나다. 어떤 사람이 모처럼 시간이 나서 영화를 보기 위해 인터넷에서 새로 나온 영화들의 평을 뒤지거나 또는 자신이 본 영화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상이 궁금해서 타인의 블로그를 서핑하고 있다고 치자. 이때 마주하게 되는 많은 글들 중 상당량이 해독이 불가능하다면 그는 어떤 기분이 들까? 그리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는 그 이유가 필요 이상으로 어렵거나 모호하게 쓰여지는 영화이야기 때문인 것 같다. 열 중 아홉은 영화감상이 취미인 시대에 살면서도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일상적인 언어로 그것을 이야기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벗어나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로 범위를 넓혀보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그 방면에 이르면 내 지식은 더욱 짧아지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애니와 만화에 대한 감상을 쓸 수는 없는 건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내러티브라는 용어 하나 때문에 시작된 이 글이 그 효용을 많이 넘어선 감이 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정신없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사는 우리는 서로 좀더 편하고 쉽게 소통되는 방법을 함께 모색해야 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그 모색은 타인에 대한 약간의 배려만 있어도 충분히 가능할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by fragment | 2004/11/03 13:48 | 잡념들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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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달고양이 at 2004/11/03 14:27
그 문단 이외에는 어떠한 전문용어도, 님께서 지적하신 '매직워드'도 없는데.. 어쨌건 다소 뜨끔한 포스팅이군요^^
Commented by fragment at 2004/11/03 15:09
달고양이 / 다소 무리가 있음에도 님의 글을 인용해서 문제제기를 한 것은 여러 글을 서핑하다가 든 생각이 님의 글에서 멈춘 것 때문입니다. 기분이 많이는 상하지 않으셨기를...
Commented by PeterR at 2007/10/14 20:03
내러티브. . 이제 대충 모양이 잡히네요 ^^ 감사
Commented by 마늘아빠 at 2010/12/21 10:06
narrative를 뭐라고 번역할지 항상 고민이었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Commented by 성준 at 2011/01/14 12:36
아, 좋은 글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윤희형 at 2012/07/21 02:56
저는 "언론사에서 대중적인 글쓰기 감각을 익힌 이들은 전문용어 대신 내러티브로 경영학 이론을 풀어냄으로써 경영학 교수나 기업인 출신 저자들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에서 네러티브가 뭔말인가 싶어서 찾아보다 와서 많은 도움 받고 갑니다 ㅎㅎㅎ
Commented by 은송 at 2012/12/28 15:26
딱히 용어를 정의할말이 없었는데 잘보고갑니다 ㅎㅎ
Commented by 과객 at 2013/01/17 00:01
가령 옴니버스식 다큐멘터리가 A 항목에서 B 항목으로 넘어가는 것을 "이야기"라 말하지는 않으니 내러티브란 단어가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문학 비평가란 사람들이 워낙 자기 잘난 맛에 사니까 buzzword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필요는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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